나는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다.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내가 받은 유일한 미술 교육은 초등학교 방과 후 교실이었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면, 때때로 교실 게시판 정 가운데에 내 그림이 붙기도 했다. 중학교 땐가, 동양화를 그리고 학교 전시회에 출품을 했는데, 그때 미술 선생님께서는 미술 해보는 거 어떻니? 하며 칭찬을 해주셨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 하지만 나는 레퍼런스를 보고 따라 그리는 건 잘해도, 나만의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는 재능이 없었다. 그냥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여하튼 그렇게 미술은 고사하고 다른 공부도 어영부영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렇게 치대에 오게 되었다. 미술 공부는 안했지만, 혼자 살면서 내 집 꾸미고, 꽃꽂이를 하고, 예쁜 디저트를 만들며 길러온 나의 미학적 재능을 펼칠 때가 온 것이다. 치대에 와서 왜 뜬금없는 미학 타령이냐고? 치의학야말로 미학의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의학과 교집합을 이루는.
의학적으로만 보자면 치과 치료는 충치 치료나 치주 질환 치료 등 질병 치료에 중점을 둔다. 환자들이 가진 질환을 의학적으로 치료하여, 그들이 불편함 없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치과적 치료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 기능을 회복하게 함과 동시에, 환자에게 미적인 만족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치과 치료 이후 환자의 만족감은 병의 치료 뿐만 아니라 심미적 결과에 크게 좌지우지 되기 때문이다.
우선은 내가 그랬다. 호주에서 충치 치료를 한번 받았는데, 받고 나서 충치로 인한 아픔은 사라졌지만, 레진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금니라 보이지는 않아도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덜 했고, 입 안을 들여다 보면 모양 역시 너무 떼운 티가 나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록 병적인 의학적 요소는 완벽하게 처치되었지만 미적인 요소는 완벽하게 처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적 요소의 처치에만 집중하면 되는 의사와 달리, 치과의사는 심미적인 부분 또한 중요하게 다뤄야 하며 이것은 치의학의 핵심 구성 요소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학문인가! 게다가 이 아름다운 학문은 나의 창의성이 아닌 환자가 가진 본연의 치아와 구강 형태를 얼마나 이전과 비슷하게, 그리고 이상적인 모양으로 복원했는지에 따라 심미의 정도가 정해진다. 즉, '나의 작품(치료의 결과물)이 레퍼런스와 얼마나 비슷한가'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내게 딱 맞는 기준이 아닐 수 없다.
이 덕에 모든 전공 과목 과제는 나름 즐겁게 하고 있다.
치대 1학년 기초 전공 과목에는 치아를 그리는 과제가 있었다. 앞니, 송곳니, 어금니들을 하나씩 골라 치아의 5면을 그리는 과제였다. 앞면, 뒷면, 양 옆면, 씹는 면을 모두 그려야 했다. 이 과제는 성적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제출은 필수였다. 물론 이 과제가 미대 수준의 과제는 절대 아니다. 당연히 내 실력도. (그렇다, 제목에서 어그로를 좀 끌었다) 그래도 대학 수업에 이런 소소하게 그림 그리는 과제가 있어 나는 꽤나 재미있었다. 앞으로 있을 전공 과제들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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